-
기차에서 러브레터 받다...신변잡기/독일생활 2025. 2. 17. 18:00반응형
매달 한 번 주말의 세미나 때문에 베를린으로 간다. 머무는 기간은 나흘. 좋기도 귀찮기도 한 이 블록 세미나를 위해 한 짐을 싸고 또 푼다.
베를린은 패션의 도시인가 자유인가 역사인가 이 모든것인가. 함부르크와 딱히 다를 것도 없지만 꽤 다른 도시와 새로운 인간군상에 마음에 들기 위해 나는 그래도 가장 예쁘고 좋은 옷으로 고르고 또 골라서 짐을 싼다.
함부르크 - 베를린은 서울 - 부산보다 덜 멀다. 두시간 남짓한 이 거리를 대부분 기차로 이동한다. 학비와 숙박의 압박으로 최대한 저렴하게 오고 가고 싶어서 플릭스 트레인을 이용한다. 2014년인가 유럽여행에 왔을 때도 즐겨 쓰던 이 버스는 이제 기차 서비스까지 있다.
이 기차는 매우 아주 매우 저렴하다. 7유로에 베를린 - 함부르크라니. 7 유로면 함부르크 내 하루 대중교통티켓 값이다. 그래서 나중에 취소하더라도 일단 끊자는 마음으로 늘 끊어두는데, 이 것의 문제는 지연 혹은 취소라는 것이다. 치명적인 단점에도 가끔 정시에 도착한다는 이유로 나는 자주 이 플릭스를 이용한다.
한 번은 베를린에서 돌아오는 길이였는데 앞에 있던 사람이 매우 아픈 듯 보이기에 온갖 스태프들이 그의 안녕을 물었는데 출발한 지 30분쯤 지났나 그는 토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너무 많이 마신 모양. 토는 웅덩이가 됐고 그 열차는 모든 사람들을 다른 칸으로 보내야 했다. 그 다른 칸은 이 엄동설한에 난방이 되지 않았다.
또 한번은 가다가 갑자기 멈추질 않나. 한두 시간 지연은 4번 왕복에 반 이상은 정시도착하지 못했던 것 같다.오늘은 11시 48분에 출발하기로 한 열차가 3시 20분에 출발 하게 됐다. 아침부터 챙겨나온 보람도 없이 카페를 전전하며 돌아다녀야 했고. 눈까지 온 이 추운 날에 지연된 시간을 계속 지연시키며 악명을 높였다.
황금올리브손톱의 남자
3시간이 넘게 지연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떻겠나. 다들 화가 났거나 짜증이 났거나. 가뜩이나 추운데 점심시간을 끼고 계속 지연됐던 열차가 결국 왔다.
플릭스 사가 만약 사람이었다면 내 머리로 플릭스 녀석은 요단강 열두 번도 건넜다… 정말 웃긴 건 이 애증의 순간이었다. 죽이니 마니 버스를 타니 내일 가니 다른 열차를 예약하니 갈팡질팡하다가도 열차가 오니 기분이 마냥 좋아졌다. 이번엔 세미나를 반 이상 놓칠 것 같지만.. 어쩌겠나.
맨 뒤에서 기다리던 내 나는 내 자리가 있는 맨 앞으로 총총 뛰었고, 수덥게 말 거는 다른 승객과 웃으며 세상에 이 기차가 오니까 기분이 좋아지다니 믿을 수가 없다며 호호하하 문 앞에 줄을 섰다. 그러다 이 승객분이 뒤에 있던 다른 승객에게 이 가방이 무거우니 좀 들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그 다른 승객은 "저는 그냥 화장실을 가고 싶을 뿐이에요, 저 사실 이쪽 칸에 안 타요" 라고 대답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 나는 당신이 나를 도와줄 거라 생각했다" 며 내가 보기엔 조금은 불편한 부탁을 계속 이어갔다.자기가 감당이 안 되는 가방을 왜 들고 왔을까…? 그러는 사이에 튼튼한 승객은 가방을 옮겨줬고 나에게도 물었다. "너도 도와줄까?" 내 가방은 꽤 무겁지만 어깨에 메고 있으니 이걸 내려서 올려달라는 게 더 번거로운 일.. 승객은 농담으로 차라리 "너를 그냥 들어 올려달라 그래" 라라고 농담을 했다. "나도 거기다 그래요 나 들어 올려줘요" 하며 웃으며 열차를 탔다.
5분 전만 해도 두시, 두시 삼십 분, 두시 사십 분, 세시 칠 분, 세시 육 분, 세시 십일 분으로 계속 지연되던 열차에 화가나 머리가 터질 것 같더니 이렇게 농담 몇 마디에 풀려버리다니. 우리는 농담을 주고 받다가 각자 자리에 앉았고. 나는 운 좋게 옆자리가 빈 곳을 찾았다. 이 모든게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고 세미나에서 해야할 프레젠테이션을 보는데 요전 그 승객이 편지를 배달합니다 라며 매우 아기자기한 핑크색 편지봉투를 줬다. 나는 이게 내거냐고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했다.
편지엔 귀엽고 작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의 손 글씨는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집중해서 대충 읽어냈다. 편지내용은 내가 탄 이 기차가 자신의 어린시절 수학여행을 떠오르게 했다며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자기의 주소를 적어뒀다. 내가 짝이 없었다면 답장을 했을까?
뒷장은 주소가 있어 생략한다 반응형